(본 설교는 www.kjbc.or.kr의 인터넷 동영상 설교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월요일 새벽부터 8명의 사람들과 함께 사진기와 촬영기를 가지고 제가 70평생을
살아온 발자취를 돌아 보았습니다. 고향에서 신앙으로 자라던 원당 침례교회, 처음
목회자로 나갔던 망월 침례교회, 은혜 받고 놀라운 역사를 경험한 반조원 침례교회,
사명받고 간 함열침례교회 그리고 대구침례교회를 돌고, 마지막 수요일에는 그곳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그곳 목사님과 성도들이 은혜받고 은퇴후에 부흥회 인도를
부탁해서 제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왔습니다.
지금부터 저의 칠십 평생을 뒤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온 고향 부역군 양화면 암수리
우리는 앞도 보아야 하지만, 뒤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살았던 고향에는
제 동생 김정기 집사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함께 예배하고 아버님의 묘지를 찾아갔습니다.
제가 부흥회를 가느라고 아버님의 장례식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아버님의 묘지
앞에서 “날 빛보다 더 밝은 천국”이라는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였습니다. 아버님의
묘지에서 보이는 산의 이름이 사당산인데, 그 산은 아버님이 예수님 믿기 전에 술
잡수시고 오시면, 넘어오던 산입니다. 그 산을 넘어오시면서 아버님이 항상 “충기야,
충기야”하고 부르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二. 내가 신앙으로 자라났던 원당침례교회
이곳에서 제가 어머님의 손을 잡고 첫 번째 원당 침례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영상에 빨간 기와집이 나오는데, 그곳입니다. 제가 자라난 원당 침례교회는 1905년
4월에 개척을 했으니 3년만 있으면 100년이 되는 교회입니다. 제가 그곳에서 신앙생활할
때 대동아전쟁 시절이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교회의 종, 수저, 밥그릇 모두 빼앗아가서
교회가 문을 닫았습니다. 해방후에 제가 시루산이라는 곳에 가서 나무를 베어서 두
번째 교회를 지었는데, 그 교회는 헐리고 고추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교회가 세 번째 원당침례교회입니다.
이 원당 침례교회를 통해서 제가 목회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세워진 원당
침례교회의 목사님 말씀이 펜윅선교사님이 강경에서 목회를 시작했을 때 금강변을
따라서 원당리까지 복음을 전함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세워졌던 그 교회에서
어머님께서 우리 형제를 개구멍으로 내보내면서 신앙을 가르치신 것이 저를 큰 종으로
쓰임받게 하신 어머님의 신앙이었다는 한 할머님의 말씀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방된 후 제 마음에 “이런 시골에서 살아서는 안되겠다” 생각하고 가출을 하였습니다.
안민도까지 도망갔었습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아버님께 수모를 당하실 어머님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는 도중에
경찰을 지원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경찰 전문학교에
같이 가면 제가 큰 인물이 될 것’이라며 저를 설득했는데, 어머님께서 저에게 항상
‘주의 종이 되라’ 하셨기 때문에 “어머님께 여쭤보아야 겠습니다” 대답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주의 종이 되어 처음 목회지로 부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곳에서 사명받아 망월 침례교회로 가게 된 것입니다.
三. 첫번째 소명받아 목회를 시작한 망월 침례교회
그곳에서 이발소를 하는 최집사라는 분을 찾아 가게 되었는데, 최집사는 없고, 예배당은
문을 닫은지 2년 6개월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그냥 가라는 것입니다.
해도 저물고 해서 그 집에 쭈구리고 앉아서 밤을 지세웠습니다. 그 다음날 주일이라
어머님이 먼저 교회로 가서 기도하시는데, 감사한 것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처럼
그 교회도 딱 세 명의 성도가 와서 기도하더라는 것입니다. 처녀 둘과 애기 엄마
한 명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문닫은 교회였지만, 그곳에도 성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저는 많이 놀랐었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목회를 시작하고 난 후 추동이라는 장로교회 권사님이 저를 좋게 보고
그곳의 한 처녀를 저에게 중매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처녀가 지금 저의
아내 박인애 사모입니다. 조금 있으면 영상에 저의 처남이 나오는데, 첫번째 처남이
77세 인데, 학교 교감으로 퇴직하시고, 두번째 처남이 72세입니다. 그는 천안 순천향
병원 원장이고, 천안 순천향 대학 교수로 계십니다. 이곳이 망월 교회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곳에서 목회를 하고 싶지 않았고, 더 이상의 목회가 괴로웠지만 저의 어머님의
도움으로 반조원 침례교회로 부임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결혼하였습니다.
四. 두번째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오순절의 역사가 일어났던 반조원 침례교회
이곳에서 처음 80여명의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도도 하지않고,
확신도 없고, 체험도 없는 전도사이니 거의 모든 교인들이 예배시간에는 졸고, 일찍
끝나기만을 바라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저는 저의 아내에게는 관심도 주지 못하고,
심지어 파출부로 일하며 저를 먹여 살렸습니다. 그곳에서 저와 저의 아내를 도와주었던
강상희 집사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번에 그곳에서 저의 아내가 처음으로 만나 끌어
안은 분이 그분입니다. 지금 반조원 침례교회는 새로 지은 교회입니다.
이곳에서 제가 목회를 그만 두려고 하다가 은혜 받고 와서 온 동네가 50일 부흥회를
하면서 진동의 역사가 일어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받았던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제가 능력의 종으로 거듭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때 대구에서 저를 초청하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五. 세번째는 소명받고 확신을 얻어 목회의 길을 걸었던 함열 침례교회
그 교회는 안수집사가 주의 종 목사에게 손찌검까지 한 교회입니다. 교인들은 10여명이
남아서 서로 싸우는 지경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당신은 능력의 종이고, 유명한
부흥사인데, 더 큰 교회로 갈 수도 있으면서 왜? 그런 문닫을 싸움하는 교회를 가려고
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능력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 많은 함열 침례교회에 3번째 목사로 부임했습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를 새로 짖고, 주택도 짖고, 땅을 600평으로 확장시키면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 교회에는 성균관 대학을 다니는 최함향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그 교회의 장로입니다. 그가 이상한 병에 걸렸습니다. 뼈마다
오그라지는 병에 걸려서 온 몸이 전부 오그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24시간 머리를
흔드는 것입니다. 그 부모님들은 자신의 아들에게 “빨리 죽으라!”말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그 집을 매일 방문하여 예배드려주며, 기도해주었습니다. 그 부모님들은 교회
안다니는 분들이었는데, 감동 받고 새벽기도를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를 위해 예배하고, 기도해줄 때 하나님이 그 앉은뱅이 청년을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와 부흥이 있었던 곳이 함열
침례교회였습니다.
六. 네번째 영적 목회를 훈련받고, 목회했던 대구 중앙침례교회
그러나 하나님은 이곳에 안주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 것 같습니다. 대구 중앙침례교회에서
저를 초청하였습니다. 그곳은 안수집사들이 담임 목사님을 몰아내고 싸움이 일어나서
동대구 경찰서에서 싸움을 말리기 위해 예배때 와서 지키는 교회였습니다. 제가 그곳을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반조원 침례교회에서는 저를 막기 위해서 이삿짐 차 앞에 누워서
못 가도록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그 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첫주일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십 여명의 신자가 나왔습니다. 그중 세사람의
안수집사가 찾아와서 저에게 다가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전임 목사님을
몰아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들이 전임 목사님을 몰아내었소?
목사도 사람인데, 실수도 할 수 있는 것이오. 그런데 당신들이 당신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주의 종을 몰아낸 것은 용납할 수 없소! 다시는 이 교회에 오지 마시오!”라고
그들을 교회에서 출교시켰습니다. 그 다음에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저의 아내는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낮에는 심방하고, 저녁에는
간장, 된장 이런 것을 가지고 집집마다 다니며 갖다주고, 방에서 먹고 자고, 서로에게
옷을 나누어 주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기쁨으로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있은 후 그 교회에서 목회자로 헌신한 사람이 4-50명이나
배출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머리가 하얗게 변한 조춘학 장로는 제가 그곳에서
목회할 때 중, 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사람입니다. 지금은 윤태준 목사님이 시무하시는데,
그분이 “이 교회를 김충기 목사님께서 잘 지으셔서 지금도 어디에 내 놓아도 빠지지
않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에게 사람들이 와서 자신은 ‘이 교회의 김충기
목사님께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라며 찾아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수요일에는 그 교회에서 말씀전하고 왔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이 저에게
“중풍으로 쓰러지셨는데도 불구하고 영력도 약해지지 않고, 건강하시니 은퇴하신
후에 대구 연합부흥회를 이 교회에서 주최 할터이니 꼭 강사로 와주십시오!”라는
부탁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교회분들이 저에게 그때 제가 대구교회를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 대구는 더 큰 부흥의 역사가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 교회를 떠나게 된 이유를 말해주었습니다. 그 당시 교회가 부흥되고
있었을 때 제가 동쪽 동촌 비행장 근처와 서쪽 월배에 개척을 추진했는데, 교회에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이 교회의 사역은 끝이 났다고 생각하고 대구 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제가 떠나려는 것을 안 교인들이 반대하고 못 가게 하였지만,
제 아내는 먼저 서울로 보내고, 저는 대전에서 부흥회를 하고 난 후 서울 강남중앙침례교회를
개척하게 된 것입니다.
七. 다섯번째는 처음이요. 마지막으로 개척을 시작하여 은퇴에 이른 서울 강남 중앙침례교회
서울로 올라와서 삼층 상가에 교회를 처음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본당을 건축하고,
교육관을 건축하였습니다. 종탑을 세우고, 수양관 예루살렘 성전과 벧엘 성전...
양수리 수양관을 하나님께 지어 드렸습니다. 이제 칠십 평생을 살고 은퇴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번 여행은 저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감사한 여행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듯이 남은 인생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십시오. 주어진 시간이 달라도 내게 생이 남아있다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