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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다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인간은 뭔가 좀 조급한 바가 많습니다.
더구나 우리 한국 사람은 10년 후를 바라보지 않고, 어떤
때는 5년, 3년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길가에 나가 보아도 50년, 100년 된 유실수를 볼
수 없고, 농촌에 가 보아도 봄에 심었다가 가을에 거두어들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생활도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확하게 수술할 수 있는 의사를 기르려면 적어도 30년
이상은 공부해야 됩니다. 그만큼 해도 자신이 없습니다.
하물며 영적인 사실을 발견할 때 교회 한 달 다녀 보고
1년 다녀 봐야 주일 52변, 그렇게 다녀 가지고 “무엇을
안다, 발견했다, 필요 있다, 없다”그런 말을 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습니다.
마태복음 14:13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셔서 큰 무리를 보셨습니다. 큰 무리라고
했습니다만 21정을 보면 장정 5,000명이라고 했습니다.
대략 호기심에 끌려 다니는 사람은 남자보다도 여자가 배
이상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자와 아이 빼고 남자만 오천
명이라면 그 무리가 어느 정도인지 우리가 대략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무리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14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이 불쌍한 사람들이
적은 무리가 아니라 큰 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중에서
병자가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니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생각해야 할 것은 첫째,
사람들은 병들고 있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나왔습니다.
해는 저물어 갑니다. 배는 고픕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광야에서 방황하는 인생들입니다. 마태라는 기자가 이렇게
썼지만 마가복음의 기자는 6:32에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고 썼습니다. 마가는 마태와는 다른 방향으로
성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큰 무리를 볼 때 “목자
없는 양 같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인생은
주인을 잃어 버렸습니다. 학생은 참 스승을 잃어 버렸습니다.
참 스승을 만났다면 학생들에게 과외 공부가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것은 학생들이 주인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국민들도
오늘 주인을 잃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건국 이래로 많은
정치가들이 바뀌었습니다. 오늘 신자들은 참 목자를 잃어버렸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자기 교회를 잃어 버리고 신앙의 뿌리가
내리지 못했습니다. 빈 들에 유거하고 있는 양떼들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빈 들에 있는 자를 가리켜 불쌍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거기는 다 병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외적(外的)으로
생각할 때에 피부병, 교통 사고, 외상,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사야 1:5 이하에 보면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은 머리가 병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골이 아프고
혈압이 오릅니다. 이와같이 오늘 우리는 빈 들에서 병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둘째로, 사랑에 굶주렸습니다. 오늘날
형제간도 많고 이웃도 많지만 동정에 굶주렸습니다. 오늘
세계 민족은 다 굶주렸습니다. 시편 107:4에 보면 “저희가
광야 사막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모든 사람은 광야 사막길
같은 데서 주리고 목마름으로 피곤하고 쓰러지는 지경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렸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물질의
풍요 속에 산다 할지라도 서로가 지나치게 무관심함으로
사랑에 굶주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거짓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진리에 굶주려 있습니다. 풍요 속에서의 빈곤이라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결핍 속에서 풍요를
주시기 위하여 사랑에 굶주린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셋째로, 때가 저물었습니다. 이들이
불안해 한 이유는 마태복음 14:15에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라고
한 데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지무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밤입니다. 성서에 이제는 밤이라고 했습니다.
요엘 2:2에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라고 했고, 마태복음
24:29에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요한계시록 6:12“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떨어지며”라고 하였습니다. 해라는
뜻은 시편 84:10, 11과 같이 여호와는 해와 방패이십니다.
빛은 참 빛,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이 세상은
어두워지는 세상입니다. 인류에 평화는 저물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평화라는 것을 크게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참 빛으로 오셔서 어두움을 비춰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이 세상은
말세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4:3이하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세상 끝에 내가 예수라 하여 거짓 선지자들이
나와 너희를 미혹하리라. 전쟁 소리만 있으리라. 기근만
있으리라. 질병이 많으리라. 땅에 변사가 오리라. 자식이
부모를 죽이리라. 자기 집안 식구와 원수가 되는 일이 많으리라”라고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주인을 찾아야 될 줄 믿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에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예언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도 그렇습니다. 야고보도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어쩌다가 말세에 재물을 쌓느냐 이
불쌍한 자들아 말세에 하나님 모르고 재물을 쌓는 자가
행복한 자가 아니라 불행한 자”라고도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베드로전서 4:7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을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들과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디모데서나 베드로후서를 볼 때에 거짓 선지자가
나온다고 수많은 제자들이 말했는데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용을 통해서 권세받은 짐승이 사람 앞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을 보게 해서 사람을 많이 미혹케 한다”고 했습니다.
넷째, 그러나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볼 때에 세상이 하나하나 종말을 예고하는
사실을 알기 바랍니다. 이때에 모든 세계 사람들은 해가
저물어가고 빈 들이고 방향 없고 인도할 자가 없고 병들고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러할 때 나를 인도하고 붙잡을 주인을
찾아야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몇몇 제자들이
병들고 해는 저물어 가는 그때일지라도 “주여 해 저물고
굶주렸는데 어떻게 할까요”하고 예수에 대한 기대를 가진
것을 믿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의 기대를 하나님께 두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42편이나 43편을 볼 때 “네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여 불안하여 하느냐 너희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를 다니다가 실망하고
실족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대를 예수님께 두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에게 기대를 두어도 잘못 기대를 둘 때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0:35을 보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묻자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오늘날
우리 중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교회를 다니는 분도 있습니다.그러나
수많은 죄를 져가면서 기대 속에 산 여자는 사마리아 여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잘못된 생활을 하면서도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오시면 모든 것을 그에게 구할 것이고 내 문제를 해결해
줄자는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인 줄 알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9을 보면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라고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입니다. 그러므로 소망과 기대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인간이나 사건에 대한 기대가 어긋난다 할지라도
예수에 대한 기대가 어긋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육신에
대한 기대가 어긋날지라도 병에 대한 기대가 어긋나지 않기
바랍니다.
다섯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4:16에 예수께서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빈 들 같은 세상에 대해 예수님께
기대를 두고 큰 은혜를 받으시려면 내게 있는 것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9장을 보니 삭개오가 ‘주여 나는
이것이 있습니다 남의 것을 도둑질했습니다’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9:1, 2에 삭개오는 부자요 세리장이라고 했습니다.
10여 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자는 재산
모두를 허비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다 내어놓았습니다.성도
여러분,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여, 내게 있는 것은 교만 밖에 없습니다. 의심하고
인색합니다. 나는 남을 미워하고, 시기합니다. 이런 것을
주님께 내놓을 때 주님께서 축사하셔서 남고 남게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어떤 어려운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을 비우고 주님 앞에 보여줄 때에 주님께서
친히 능력으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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