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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하나님은 밤새 이슬을 내려 주시고,
또 비를 내려 주셔서 식물을 자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끼시는 분이십니다.
인간들은 집단적으로 모여 살면서 어려우면
서로 도와주고, 위로해 주고, 아껴 주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자기 가정밖에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친척도, 씨족도, 가문도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아끼고 도와주고 위로해 주는 범위가 너무나 좁아졌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부모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나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금은 씨족 적인 것이 좁혀져서
친척, 친척이 좁혀져서 가정, 가정이 좁혀져서 나, 이렇게
하여 자기밖에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은 내 것이라면 끔찍하게 아낍니다. 때로는
법정에 호소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은 자기
것을 사랑합니다. 요나는 “하나님, 이와 같은 고통과 괴로움을
무엇 때문에 주십니까? 멸망시키시려면 멸망시키시고, 아니면
자비와 긍휼과 사랑으로 용서하시든지”라고 불평하였습니다.
이런 요나에게 하나님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 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고 하셨습니다.
오늘 인간은 자기 것을 아낍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아낍니다. 내 속에서 난 자식이기 때문에 건강한
자식뿐 아니라 병든 자식도 사랑합니다. 부모님들은 병든
아이를 건강한 아이보다 더 생각합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에게
잘 하는 아이보다 더 관심을 가집니다. 출가하여 잘 사는
자녀보다 못 사는 자녀를 위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순종하는
아이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하는 아이도 사랑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런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 인간을 대단히
아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대단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 인간을 아끼지 않으셨다면 노아에게
방주를 예비하라는 말씀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백여 년
동안이나 참으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창세기 6:5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하신
것같이 사람은 너무나 악했습니다. 생각이 악하고, 행동이
악해서 하나님은 당장에라도 그들의 죄를 보응하시기를
원하셨지만 인간을 아끼셨기 때문에 백여 년 동안을 참으시면서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줄도 모르고 더 범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할 수 없이 죄 값으로 사망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계속적으로 죄를 저질렀습니다.
범죄로 범람하는 세상을 하나님은 홍수로 다시 멸망하시기로
하셨습니다. 레위기 1장을 보면 사람의 죄를 위하여 대신
소와 양을 잡아죽이고 사람의 생명을 아낀 것을 믿기 바랍니다.
소와 양을 대신 죽이고 사람의 생명을 아낀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인간은 영원히 죄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짓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죄짓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인이고, 또 연약하기에 죄를
두려워하면서도 죄의 길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후서 3:8이하에 보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왜 발람 선지자가 어그러진 길을 걸어갔을
때 나귀를 통해서 책망했을까요? 그것은 발람 선지자를
아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범죄했을 때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왜 책망했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했고
아끼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6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430년간 애굽에서 고통을 당하게 하셨고, 광야에서 연단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기도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은 그들을 미워하여 그렇게 하시냐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진정 그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은 주전 800년경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멸망받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참고 참으셔도 돌아오지 아니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심판을 내리시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성이 멸망되지 않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요나를 불러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악독이 내 앞에 상당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요나는
사명자입니다. 요나는 이미 구원받은 자입니다. 요나는
하나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가 사명자입니다. 모세와 같은 경우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하사 진멸코자 했을 때 출애굽기
32:11-14과 같이 하나님께 구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돌이켜
화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와같이 사명자는 생명을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다메섹 도상에서 주의
음성을 듣고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영혼이 살아남으로
그는 그 동안의 세상적인 모든 미련한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 동안 자랑하던 어리석은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골육 친척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므로 멸망받게
됨을 염려하였습니다. 로마서 9:3에 나의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한 말씀이 오늘 사명자의
심정인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 성으로
가라’할 때 가지 않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하였습니다. 또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 1:4-11를 통해
보면 ‘요단강을 건너가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6:1-8을
보면 스랍의 옷자락을 본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하며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1:4-6에는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니
에레미야는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모세나 여호수아나
예레미야 모든 이들이 가라고 했을 때 ‘예! 가겠습니다.’라고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세는 ‘말할 줄 모른다’고
했고 예레미야는 ‘어린 아이’라고 핑계를 대었습니다.
또 이사야는 ‘내 입술이 부정해서 못 간다’고 하였습니다.
사명자의 길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 ‘가라’고 할 때에
사명자의 길이 고달프고 힘들고 괴롭고 환영받지 못할지라도
가야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20:9을 보면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수많은 멸시와 모독을 당하니까 예레미야는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리라”고 하며 주저앉으면서 속에서
불붙는 것 같다고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가서 외치고, 외쳤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구원받고, 성령을 받고,
구원의 즐거움으로 가야 될 줄 믿습니다. 강퍅한 이웃에게,
외면하는 이웃에게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모두 그들에게
환영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마음이 강퍅합니다. 그러나
담대히 가서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과거에
가졌던 기쁨, 구원의 확신, 구원의 체험을 그들도 얻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나 하나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나 하나 구원받은 것으로 안일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이제는 우리가 애써 전해야 될 때입니다.
누가복음 15:1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100마리 중에 1마리 길 잃은 양이 있는데 그 1마리 양을
찾기 위해 강을 건너고 산을 넘으며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할 것 없는 99마리의 양보다 1마리 양이 돌아올 때
더 기뻐하셨습니다. 요나서를 통해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요나서 1장은 부름받은 요나,
2장은 기도하는 요나, 3장은 전도하는 요나, 4장은 불평하는
요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1장을 보면 요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름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망하는 사명자를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풍랑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배 안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산 제물을 바다에 던져 넣기로 하고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요나가 뽑혀서 바다 속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던져진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요나서 2장은 기도하는 요나입니다.
1, 2절에는 요나가 부르짖고, 3-5절에는 불평을 했습니다.
6-8절은 고백하게 됩니다.“구원은 하나님께 있나이다 나를
살릴 자는 하나님입니다”라고 회개하자마자 물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해 냈습니다.
그러나 3:1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고 했는데 이것은 요나에게 다시
주시는 사명입니다. 그제서야 요나는 니느웨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가서 외쳤습니다. 놀라웁게도 니느웨 성의 모든
백성은 회개하였습니다. 회개한 요나 말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었습니다.
이것은 요나가 하는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믿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구원받은 기쁨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지금 절망과 좌절 속에 있는 자들에게 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 싫었지만 하나님이
보내셨기 때문에 입만 열어도 역사가 일어난 것을 믿기
바랍니다. 김 충기가 위대해서 부흥회를 수십 년 다닌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믿고 나가면 하나님이 쓰시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우리는 분명히 구원받은 즐거움으로 열심히
전도하면 이 즐거움이 계속됩니다. 여러분이 기쁨을 계속
가지시려면 전도하기 바랍니다. 이웃의 생명을 사랑할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대단히 안일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니느웨로 가라 하셨는데 다시스로 갔습니다.
가서 외치라 하셨는데 배 밑창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도 신자들이 은혜받는다고
이 부흥회, 저 부흥회 쫓아다니고 앞자리 앉으려고 열심을
내던 분들이 얼마 되지 못해 불평자로 바뀌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 일에 봉사하지 아니하면, 또는 주의 일을
하지 않으며, 전도를 하지 아니하면 그들은 불평자로 바뀌어지고
맙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이제부터 정말 니느웨로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교인
하나가 돌아오면 우리는 진정한 기쁨으로 환영해야 됩니다.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제직이면 제직일수록
더 사랑해야 합니다. 나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목사니,
교회 제직들 중에는 직분이 좀 높은 사람들은 인사를 해도
외면해요.”그러나 우리는 높아질수록 더욱 겸손히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할 줄 아는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요나는 자기주의, 이기주의-나 하나
구원받았으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니느웨
성이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서 4:1-3을
보면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라고
한 것처럼 당시의 이스라엘 선민들은 자기들만이 구원받고
이방인은 망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선민이니까 우리만
구원받고 이방인들은 모조리 저주받아 멸망받으라는 식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나 같은
잘못된 마음을 갖지 마시고 정말 생명 하나가 회개하면
우리는 기뻐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초막 아래서 쉬고 있었습니다.
이런 요나에게 하나님은 박 넝쿨로 그 위를 덮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4:6에서처럼 심히 기뻐하였습니다. 진정
기뻐해야 할 일은 기뻐하지 않고 박 넝쿨이 덮이므로 자신의
편안함으로 기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뜨겁게 내리쬐니
요나는 죽기를 구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이것으로
보아 요나는 배짱이 센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10절 이하를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고 쓰여 믿기 바랍니다.
풍랑을 안 일으켰더라면 엉뚱한 곳으로 갔을 것입니다.
풍랑을 일으켜서 그의 사명을 다하게 하셨고 배 안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두려움을 알게 하셨고, 또 니느웨의
백성들을 회개시킴으로 그들의 생명을 살리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요나도 살리고 배 안의 많은 사람도 살리고 니느웨
성의 모든 백성도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이 우리들을
아끼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끼십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하시더라도 한 사람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의 영혼을 아끼시거든 우리도 한 사람의 영혼이
교회에 나올 때 내가 그의 마음에 상처를 주어서 그가 만약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사람을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메고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성도님들, 한 마디라도 조심하여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고생스러워도, 어려워도 우리
교회는 여기에 멈추지 아니하고 더 크게 성장하는 교회,
축복받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멸망시키지 아니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원하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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