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자신을 돌아보자

본문 | 히12:15-17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어느덧 겨울도 가고 봄이 왔습니다. 우리는 해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올해는 꼭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 기도도 많이 하고, 전도는 물론 감사 생활을 많이 해야겠다, 가정도 복음화 시키겠다 등등 여러 가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겠다고 다짐도 하고 결심도 많이 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3:5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더듬어 보면서 정말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았느냐 되돌아 봐야 합니다.

만약 금년 12월 25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면 내가 부끄럼 없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주님이 나에게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도무지 알 수 없다고 하시지는 아니하실까?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나이다”라고 했을 때,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이 불법을 행한 자야”라는 책망은 받지 않을까?

지난해에도 목표를 두고 열심히 기도했지만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허전함과 공허함이 누구나 다 있을 줄 압니다.

그런 뜻에서 자신을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가 버립니다. 미처 자기 잘못을 깨닫기 전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행동에 대한 잘못을 지적해 줄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 요즘 교만해졌어,”“성격이 난폭해지고 사람이 많이 변했어.”이런 지적을 당하면 몹시 화를 내고 분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지적을 받게 된 까닭을 생각하고 자기를 돌아본다면 그 사람은 성공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런 것 저런 것을 지적해 오면 오히려 귀를 기울이고 자신을 바로 관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불쾌하게 생각하고 억울하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사회는 점점 더 대화가 단절되고 서로에 대한 불신의 벽이 두터워집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눈이 정확합니다. 그보다 더 가장 가까이 있는 남편이 아내를 돌아보게 하고, 또 아내가 남편의 행동을 돌아보게 할 때 그것이 자신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될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부부간에도 부모와 자식간에도 불신의 벽이 생깁니다. 비록 남편이나 아내가, 또는 부모와 자식이 이해해 주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해 주고,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심을 믿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겠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지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2:46)면서 일축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이 나왔을 때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자기를 알아보는 예수님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주님은 빌립이 말하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을 때 너는 보았노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알고 자기 속마음을 아는 자 앞에 나다나엘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를 아는 자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당하는 분하고 억울한 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때로 오해받고 사는 줄도 다 아십니다. 목회를 해오는 중에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 할 때 저는 홀로 이 찬송을 부릅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때로 여러분들도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하여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이 찬송을 부르십시오-아시지요 아시지요 아시지요 주님.

우리들은 모두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제일 큰 인정은 하나님에게 받는 인정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큰 인정은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 가정에서 인정받지 못하고는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가장 속속들이 알고 인정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참된 나를 찾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4:22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먼저 건너편으로 갔습니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바라보신 후 한적한 곳에 따로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제자들이 탄 배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졌습니다. 바람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깜깜한 밤 방향도 모릅니다. 풍랑은 몹시 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고난 당함을 아시고 물위로 걸어오셨습니다. 고난 당한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하고 예수님을 인정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려면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1:23 이하에 “하나님 말씀은 거울과 같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듯 자신의 마음을 말씀에 비춰보라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성막 안에는 물두멍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이 물두멍에 수족을 씻고, 성소에 들어가야 죽음을 면한다고 했습니다. 이 물두멍은 성소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놋 거울로 만들었습니다. 놋 거울에 자기의 모습을 비춰본 후에 더러운 것을 씻게 한 것입니다. 성경이 바로 우리의 거울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말씀에 비춰보십시오. 자신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5:26에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모르겠거든 성경에 비춰보십시오. 우리가 신앙하는 미래에 대하여 모르겠거든 요한계시록 11: 15에 비춰보십시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자신의 모습을 성경에 비춰보면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주의 말씀 앞에서만 가능합니다.

금년에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고 사업을 했다면 실패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가정의 파괴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인으로서는 어떻게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까?

히브리서 12:5을 봅시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라.”내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한 자가 아닌가 하고 자신을 진단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은혜란 무엇입니까? 부흥회에서 은혜 받았다, 산 집회에서 은혜 받았다, 간증에 은혜 받았다, 설교에 은혜 받았다고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그러나 병든 사람에게는 건강이 은혜입니다. 직장이 없는 사람에게는 취직이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는 기독교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인으로서 진정한 은혜는 무엇인가?

1. 구원의 은혜입니다.

구원의 은혜라는 것은 중생의 은혜를 말합니다. 영혼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9에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이 구원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2;8).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불교나 기독교 중에 이것 믿을까, 저것 믿을까, 자기 의사대로 선택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나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를 택해 주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강아지를 한 마리 사려고 동물 시장에 갔다고 합시다. 여러 종류의 강아지들이 서로 ‘나 좀 사가세요’한다고 삽니까? 그 중에 내 마음에 들어야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6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했다”고 했습니다.

사람 선택에 대해 우선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가장 미련한 것 같습니다. 제자들을 택할 때 좀 더 훌륭한 사람을 택했어야 함에도 바다에서 겨우 고기나 잡는 어부를 택하셨습니다. 본래 베드로는 학문이 없는 사람입니다. 말재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할 때마다 병자가 치료되고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을 입은 사람은 다른 인격자로 바뀐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를 어머니 태에서부터 택정했다”고 합니다. 교회를 파괴하고 교인들을 폭행하고 살인자인 자기를 하나님이 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 택정해 주신 것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게 했습니다. 중생의 은혜는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보면 율법을 준수합니다.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바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들입니다. 시장에 가면 문안을 받고 잔치석에 가면 상좌에 앉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하고 오히려 책망했습니다. 중생의 은혜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중생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셨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마 3:7, 8). 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도끼로 찍어버린다고(마 3:10)했습니다.

우리는 원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돌감람나무였습니다. 그러나 참감람나무인 예수님께 접붙여졌습니다. 로마서 11:17 이하의 말씀대로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받으므로 나의 돌감람나무라는 육에 속한 것은 다 없어지고, 예수의 마음을 갖게 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하늘의 것을 얻게 된 것입니다. 중생이나 거듭났다는 말은 인간성이 변화된 것을 말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으로 향하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육을 쫓던 것이 영의 길을 따릅니다. 우상을 섬기던 자가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중생은 말씀이 내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2. 성결의 은혜입니다.

중생이라는 것은 원죄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성결이라는 것은 자범죄의 해결입니다. 우리들 주위에는 교회에는 다니지 않지만, 착하고 진실하고 선한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 문턱에 와 보지 않았는데도 한없이 착하고 양심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잘못이 없고 죄가 없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생하지 못하면 그의 영혼은 결국 망하고 맙니다. 우리는 비록 선하고 양심적이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의 선물을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로는 결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4:5에는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중생했어도 인간 자체가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중생 이후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살기등등하여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이 은혜를 받고 거듭났으나, 그에게는 아직 성결이라는 거룩한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너무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후서 7:1에 말했습니다. “너희는 온전히 거룩함을 입으라.”영과 육이 거룩함을 입어야 됨을 뜻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에도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고 또 너희 영과 혼이 우리 주 강림하실 때에 흠이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은사가 필요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원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죄받고 자범죄는 은사가 있어야 해결될 줄 믿습니다. 은사가 우리를 구원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은사를 체험하게 되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은혜받고 거듭나서 하나님을 믿으면 지금 죽어도 영원히 구원받을 것을 확신합니다. 그런데도 혈기가 납니다. 중생한 자는 돌아서서 금방 ‘아이고 주여, 내가 또 혈기를 부렸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또 더렵혔습니다. 용서해 주세요’하고 뉘우칩니다. 그러나 은사를 얻은 자는 혈기가 날 때에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하여진다는 것은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위로부터 공급받는 것을 말합니다.

3. 감사의 은혜입니다.

감사할 조건에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감사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빌립보서 4:15에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찬사룰 보냅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 4:15-18). 고린도후서 8:1 이하에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받기만 하고 구할 것만 아니라,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커야 될 줄 믿습니다. 중생의 은혜를 받고 성결의 은혜를 받아 그것으로 끝나지 마시고 감사하는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이 한 해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에 게을리한 것을 남은 시간 동안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일 년 동안 이루지 못한 것도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단 몇 시간 안에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은혜 받기 전에는 겨우 주일 예배만 참석했는데, 이제는 감사함으로 새벽 기도회까지 예배드리게 됩니다. 주일 헌금 천 원 하기도 아까웠던 사람이 십일조도 바치고 또 감사 헌금도 드리게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28에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시시때때로 변하여 진동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들림 없이 살아가려면 은혜 속에 있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는 육체의 장막집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더 나은 본향에서의 아름다운 처소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섬기는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는 새 예루살렘, 하늘의 도성, 시온성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만 섬기며 살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있어야 합니다. 앉으면 원망하고 타박하며 흠잡을 것만 찾고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이런 쓴 뿌리를 뽑아 내고 그 나라에서 누릴 기쁨을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속에 있는 쓴 뿌리는 무엇입니까? 사람을 가까이 하다가 실패했습니다.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인간을 기쁘게 하는 삶도 제거해 내고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2에 봅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예수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고 괴로움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결국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보좌 우편에 앉게 되셨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로 얻어진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봅시다. 예수 안에 자신을 비춰볼 때 진정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깊이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했다면 이미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말씀과 기도 속에서 성결한 삶을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전심을 다한다면 자신에 대한 부족함이 감사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