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보배롭고 요긴한 모통이
돌을 시온에 두었다고 하셨습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습니다. 이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4, 5에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에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삼각산을 바라다보면 돌이 삐죽삐죽
솟아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흙으로 덮여 있던
것이 비바람에 깎이고 해서 그 아래 바위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에도 땅 아래 바위가 나올 때까지
땅을 깊이 파고 주초를 세웁니다.
성경에는 여러 차례 예수님을 ‘돌’이라고
상징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10 이하에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3-4을
보십시오.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반석에서 터져
나오는 생수를 마셨습니다. 당시에는 반석이라는 바위에서
생수가 나왔지만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반석이 되어
모든 목마른 자들의 갈증을 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이상을 본 것이 있습니다.
뜨인 돌이 신상을 치니까 그것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습니다.
이 뜨인 돌이 그리스도를 상징한 것입니다. 블레셋을 물리친
다윗은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작은 돌 하나라도
성경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가장 요긴한 돌로서 이 땅에
오셨지만 이 땅의 건축자들은 예수를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마룻간에 탄생하셨을 때 헤롯 왕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받은 자였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제자들에게까지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버림받은 자들이 많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서, 아내는 남편에게서 버림받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서, 자식은 부모에게서 버림받습니다. 친구에게
버림받고, 스승에게 버림받고, 스승은 제자에게 버림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담이 그렇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은 낙원으로부터
버림받게 되었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노아의 여덟 식구’를
제외하고 모두가 버림받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버림받았습니다.
우리들도 다 버림받은 자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10을 봅시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어떤 사람은 버림받지 않기 위해 사람들에게
좋게만 합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앓고 있는 질병이
바로 소외감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당한 것
같으니 하나님께 요긴한 돌이 된다면 우리는 사람들로부터도
결코 버림받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버림받은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오늘 나와 여러분이 요긴한 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마 5:14).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입니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이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입니다. 그래서 가장 요긴한 돌로 오신 그리스도가
오히려 어두움 가운데서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비춰 주는 요긴한 하나님의
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빛 된 모습 속에서 어둠에
처한 사람들이 걸려 넘어져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우리는
빛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마
5:13)고 하셨습니다. 소금은 썩을 것을 썩지 않게 하고,
맛을 내게 합니다. 무슨 요리든지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제 맛이 나지 않습니다. 맛을 낼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소금이
부족하면 쓰러져 죽고 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맛을 아는 요긴한 돌이 되어야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부패해
버린 사람들을 썩지 않게 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썩어 가는 인간을
썩지 않게 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나 양을 잡아 속죄제로 드릴 때 죄로 인하여 죽어 썩어질
인간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인간이 영원히
썩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부패를 막아 주셨습니다. 인간의 양심이
썩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새롭게 됩니다. 우리의
육체가 질병으로 썩어질 때, 예수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됩니다. 학문이나 사상의 오류로 인하여 우리의 정신이
썩어져 갈 때, 우리는 진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썩어 미움이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됩니다. 인간의 영혼이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갈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이제는
썩지 않고 영원토록 살 수 있습니다.
예수를 아는 자는 진정한 인생의 맛을
압니다. 소금이 모든 음식물에 맛을 내듯 우리 인생의 맛은
예수로만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인생의 조미료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사람들에게 버려진
돌같이 여려진다 해도 모든 인생의 조미료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 중에도 과거의 세상 친구들이
볼 때 한심하게 생각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도 어울려
지내던 친구들로부터,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일에 취미도 없습니다. 과거에는 돈만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고, 골프 좋아하더니 이제 세상에서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 맛있는 예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버리운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퉁이 돌처럼 요긴한 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1-3을 봅시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우리는 이런 맛을 알기 때문에 어떠한
멸시도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순교자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맛을 모르는 자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밥은 굶어도 담배를 피워야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담배가 없으니까 호박잎도
말려서 피우더군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담배 맛을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의 맛을 압니다. 호박잎까지
말려서 태우던 그 맛과는 비교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의
사랑의 맛을 알면 담배 맛도, 술맛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세상의 맛보다 찬송의 맛, 기도의 맛이 더 좋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맛을 알고 나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각오하게
됩니다.
우리는 버린 자가 아니라 요긴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장하지 못하고 인습에 젖어 있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맛을 알고 행해야
합니다. 제직이든 교사든 성가대원이든, 봉사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의 맛을 알고 섬길 때에 우리의
영은 성장하게 될 줄 믿습니다. 빛이 필요하고 소금이 꼭
필요하듯이 요긴한 자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탄의 캐롤이 온 거리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신 뜻을 알리기 위한 노래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선포하는 노래입니다. 이 땅에 충만해야
할 평화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 노래는 어떤 자에게는
요긴한 노래가 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자에게는 쾌락의
도구나 망년회의 흥을 돋우기 위한 노래로 변해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어 이
세상의 주초를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요긴한 돌이 되어야 합니다. 부정이 있는 곳에서의
요긴한 자는 그 부정을 방지하는 자입니다. 부정을 묵인하지
않는 자입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서의 요긴한 자는 희생을
무릅쓰고 사랑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파렴치한 자가 있는
곳에서의 요긴한 자는 성실을 보여 주는 자입니다. 병든
자를 찾아가 위로해 주는 자입니다.
누가복음 4:18, 19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금번 성탄은 사랑이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양로원을 방문합니다.
고아원을 방문합니다. 사회 복지 시설을 찾아갑니다. 주는
자는 주는 자의 위치에서 동정심 가득한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봅니다. 주는 자는 자기가 그런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에
우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리고 높은 위치에서 선심을
씁니다. 이것은 주는 자의 교만입니다. 베푸는 것으로 자기
만족을 찾습니다. 받는 자는 해마다 연말이면 찾아오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기뻐하기보다는 얼마짜리 정도가 되리라는
계산부터 합니다. 받는 자의 비굴함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그렇게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런 선심이나 당연한
베풂을 가르치지 아니하셨습니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인간의
죄로부터 오는 교만과 비굴함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죄의 해결을 위해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진정으로 요긴한 자가
됩시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가 그들을 죄로부터 해방시킵시다.
어떤 물질적인 선물보다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요긴한
자는 예수님처럼 영혼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줌같이 우리들도
스스로 이웃의 필요를 위해 내어주는 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부끄러움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요긴한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신도 요긴한 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돌은 세상 어느
보석보다도 귀중한 보배입니다. 이 보배를 간직할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전해 주는 요긴한 자가 됩시다.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통이 돌을 시온에 두어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성탄의 기쁨이 온 누리에 가득찬 주일,
여러분에게 한없는 주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