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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셀라)-시편 62 : 1-4
대단히 시끄럽고 요란한 세상입니다.
서로 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특별히 선거철을 맞이하여
서로 비방하고 공격하는 소리가 매우 높습니다. 상대방의
인격이나 자존심은 어찌되든지 상관이 없다는 식입니다.
자기가 당선되고 봐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
국민들은 못 살겠다고 야단입니다. 사업이 하루 아침에
무너집니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릅니다. 사회는
너무 혼란합니다. 그러다보니 정책 없는 정치, 경제, 교육,
통일에 대해서 불만의 소리가 높습니다. 누가 이 시끄러운
세상을 잠잠하게 할 수 있습니까? 돈 많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권력을 쥔 사람이 가능합니까? 돈이나
권력으로 될 것 같지만 안됩니다. 이 땅의 어떤 사람도
세상을 잠잠케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을
잠잠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있으면 누구에게 하소연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입장을 천명하고
자기의 진실을 밝히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쉽게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뿐만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에 대해서 비방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할 말이 많지만 말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고
교훈합니다(1절). 본문을 통해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자신을 보자.
남편이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하고 출근을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오니까
이번엔 아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가정에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경우에 대부분
큰소리가 납니다. 불평과 불만을 말하고 상대방의 실수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책망하고
탓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문제를 자기에게서
먼저 찾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왜 그럴까?' '내가 뭐
잘못한 것이 있는가?' 이렇게 되면 문제는 쉽게 해결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의 결점은 잘 보지만 자신의
결점은 잘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기 전에 먼저 상대방을 책망하거나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7 : 4이하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는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보다도 내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아야 할 줄 믿습니다.다시 말해서 자신을 먼저 보아야
하겠습니다. 상대방의 실수를 보고 나의 실수를 생각하고,
상대방의 약점을 보고 나의 약점을 생각해야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신만만했던
사람입니다. 당시에 학벌이나 가문, 사회적 지위, 명예
등 모든 부분에서 뒤지지 않는 그런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3 : 4이하를 보면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 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자는 자로다"고 했습니다. 이런 바울이 자신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바울은 예수 믿는자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기 위해서 다메섹을 향해 갑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4절). "주여 뉘시오니이까?".(5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5절). 이 음성을
듣고 그는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동안 핍박했던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후에 그가 고백하기를,
디모데전서 1 : 13에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5 : 8에서 자기는 "만삭되지 못한 자"라는
고백을 합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도적은 빛을
싫어합니다. 빛이 있으면 자기의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자신을 은폐시키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감추고 덮고 은폐시켜도
그리스도 앞에 서면 드러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 : 7 이하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자기를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은 자기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천하도 자기가 있고 난
다음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천하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때 누가 나를 지적해 주는 일이
있습니다. 흔한 일은 아닙니다. 사실 누구를 지적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적하지도 않고 지적하는
것을 받아들이지도 않는 것입니다.아마 이 가운데도 누가
자기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젊은 사람들이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깊이 생각해 보면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 같은 것을
지적해 준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볼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지적해 주면 고맙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겉이 아프면 그 아픈 것이 쉽게 발견됩니다.
그러나 속이 병들면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속에 깊은 병이
든 것을 모르고 있다가 정작 발견했을 때는 손을 쓸 수가
없어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그러므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신을 볼 수 있습니까?
자기 스스로는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거울이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1 : 23에"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 : 11에 "저희에게
당한 이런일이 거울이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거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심판을
받은 것이나 불의를 행하여 진노를 산 것을 기록한 것은
우리가 성경을 보고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자신을 발견합니다.
누가복음5장에 보면, 시몬과 몇몇의 어부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 시몬이 대답하기를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힙니다(6절).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몬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시몬은 말씀에 순종하고 보니 자기가
죄인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거울인 말씀 앞에 설 때 자신을
발견합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영원한
축복을 받습니다.
2.이웃을 보자
요즈음 이웃이 없습니다. 누구의 도움이나
간섭받기를 싫어합니다. 그저 자기만 편하면 됩니다. 옆에
살고 있는 이웃도 나와는 무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부간도 이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근원은
하나입니다. 근본이 같습니다. 모든 사람은 시작이 같고
모적이 같으며 마지막이 같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입니다(창 1 : 27), 곧 하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웃을 새롭게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인간은 더불어 삽니다. 절대로 혼자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게 이웃의 도움을 주고
받으며 사는 것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이웃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참 이웃에 대해서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게 됩니다.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얼마나
맞았는지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행스럽게도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냥 가버리는 것입니다. 조금있으니까
레위 사람이 지나갑니다. 그 사람 역시 못본 체 하고 가버립니다.
그들은 강도 만난 자와는 동족입니다. 같은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작 도와주어야 할 때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그후 사마리아인이 지나갑니다. 그는 강도 만난 자와는
원수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16절) 그들은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합니다(17절). 그 때 주님은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아무런 관계까 없어도,
아니 나와는 원수 관계에 있다고 해도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면 나의 이웃인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관심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이런 이웃에 대해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9 : 1 이하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웃을 어찌나 사랑했던지
그 사랑하는 마음을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이웃의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웃에 대해서 십자가를 지려고 합니다. 절대로 이웃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웃을 바라보면 실망하기도
합니다. 내가 나를 보아도 실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웃을
볼 때는 더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나를 보아야 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보고 이웃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모두가 귀하게 보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보고 이웃을 볼 때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하나님을 바라보자.
과연 우리 현실 속에 기대하고 바랄
만한 자가 있습니까? 소원을 두고 도움을 구할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지난 봄방학 때 저희 양수리 수양관에서 산상
집회를 가졌습니다. 집회 중에 어느 여대생에게 '이 세상에서
무멋을 가장 귀하게 여기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학생이
대답하기를 '내게서 하나님을 빼면 이 땅의 모든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귀합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정답입니다.어떤
학생들은 가장 귀한 것이 부모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 보다는 친구라는 하는 학생이 많았습니다만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하나님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요 참 만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물
1절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관심은
다른 데 있습니다. 부모보다도 친구나 이성을 더 좋아합니다.
이것은 나이가 점점 들어갈수록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자식에서 있어서 부모가 참 만족이 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만족을 주는 대상을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몹시
시끄러웠습니다.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애굽인들이 뒤쫓아
오니까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11,12절에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홍해가
가로막았다고, 광야에 먹을 것이 없다고, 피곤하고 힘들다고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모세는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4 : 13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했습니다. 좀 기다리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당장 뭐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불평하고 원망하며
야단법석을 떠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 4 : 35 이하를 보면 바다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자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편지 주무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깨우면서 말하기를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고 바다에게 명하시기를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시끄러운 세상, 풍랑이는
세상은 주님이 잠잠케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대명사 욥은 모든 소유를 잃었습니다.
아내까지 자기를 저주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구들이 조롱하자
그때 욥이 하는말이 "너희가 잠잠하고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욥
13 : 5 ). 그리고는 자기는 전능자에게 말하고 하나님과
변론하겠다고 합니다(3절). 그러니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잠잠하라고 하니까 입다물고 조용히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입을 다물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처사입니다.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할 말이 많지만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유익할 때가 있습니다. 욥은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할 말이 많았지만 그는 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말했습니다.
우리가 억울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사람앞에서 잠잠하고
먼저 하나님께 말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해야
합니까? 사람에게는 진정한 도움을 기대할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몇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구원이 하나님께로
나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을 봅시다."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에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고
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시오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고
했습니다. 넷째로 권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11절에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고 했습니다. 다섯째로
하나님은 인자하셔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12절에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말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자주
부르는 은혜의 찬송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지만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면 만족함이 있다는
찬송입니다. 이번 한 주간 사람과 세상에 대해서는 잠잠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삶이 이루어지실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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