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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떳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사도행전 9 : 1-9
사울은 소리를 듣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권면을
들을 줄 몰랐습니다. 조언과 책망도 들을 줄 몰랐습니다.
물론 그에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기도 했지만 가령 말을
했다 하더라도 전혀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을 때 이 일이 부당한 일인 줄 알면서도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행 7 : 54-60). 사울이 이 일을
마땅한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행 8 : 1). 또한 사울은
당시에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였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 : 5 이하에 의하면, 그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요,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며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당시의 최고의 학부인 가말리엘 문하생이며 로마의 시민권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무슨 말을 한다고 한들 웃기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이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7장의 내용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스데반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행
7 : 51)들에게 복음을 외쳤습니다. 그가 외치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그를 사울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박해가 심해지자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사도행전 8 : 1에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있고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절에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흩어진 유대인들이
있는 곳까지 찾아가 핍박을 했습니다. 본문 1절에도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울에게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어떤 말을 했던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사울은 소리를
듣지 않았고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울이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느날 흩어진 유대인을 찾아가던 중 다메섹에 이르렀을
때 이상한 현상과 함께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이 깜짝 놀라며 묻습니다. "주여 뉘시오니까?"
그 소리가 대답하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이 바로 하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하늘의 소리가 들려오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은 대단히 시끄럽습니다. 특히 지난
20여 일 동안에는 더욱 시끄러웠습니다. 광역의회선거 때문에
대단히 소리가 많았습니다. 이제서야 좀 잠잠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또 시끄러울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우리는 소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슨
소리를 들어야 합니까?
1. 세상의 소리를 듣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대단히 시끄럽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소리가 들리는 세상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들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들어야 합니다. 듣지 않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듣지 않고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의 소리도 들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소리는 육의 소리입니다. 육의
소리는 인간의 소리요 정치가의 소리요 가정의 소리입니다.
서로 자기가 먼저 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좀더 잘 입고
잘 먹기 위한 소리가 많습니다. 세상의 소리는 소음이 많습니다.
자동차 소리, 공장에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여기 저기서
개발하는 소리 등 소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괴음이
있습니다. 괴음은 괴상 망측한 소리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터무니 없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런 소리는
모두 괴음입니다. 또한 파음이 있습니다. 파음은 파괴시키는
소리입니다. 서로 물고 뜯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서로
잘났다고 떠들고 서로를 비방합니다. 모든 문제는 상대방에게
있지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들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파음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또한 고음이 있습니다.
고음은 군중심리에 의해서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요즈음 세상을 보면 고음이 나는 곳으로 사람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고음을 내는 사람이 이기는 것같이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땅덩어리가 좁기 때문에 자동차
사고가 자주 납니다. 가끔 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난 것을
볼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서로 잘못이 없다고 떠들어 댑니다.
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을 하고도 크게 떠듭니다. 그래서
초보 운전자들은 자기가 잘못이 없는데도 상대방이 너무
크게 떠드니까 자기가 잘못한 줄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음을 내기도 합니다. 이번에 선거를 끝내고 보니
고음을 낸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소리만 컸지 실속이
없었습니다. 빈 깡통 소리가 요란하기 마련입니다. 그런가
하면 저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입으로 말하지 않고 속으로
가지고 있는 소리를 말합니다. 또한 세상에는 신음이 있습니다.
이 소리는 고음도 저음도 아닙니다. 혼자 푹푹 앓는 소리요
죽어가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또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자기의 소리를 듣자.
우리는 세상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자기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자기의 소리는 마음의 소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남이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민감합니다. 나를 칭찬해 주고 높여
주며 인정해 주면 좋아합니다. 이런 말을 좋아하게 되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내 속에서 나에 대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하는 말과 내가 나에 대해서 하는 말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하고 높여 주는 만큼 실제의
나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상대방이 나를 비난하고
불평하는 만큼 실제의 나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하는 말보다도 자기가 자신에게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리는 또한 양심의 소리입니다.
우리는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세상은
양심의 소리를 들을 줄을 모릅니다. 양심의 소리는 누구나
들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든 믿지 않든 사람이라면 들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더욱더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자기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입니까? 양심의 소리, 마음의 소리, 자기 내부의 소리를
왜 듣지 못하는 것입니까? 디모데전서 4 : 2에 의하면 양심이
화인 맞았기 때문입니다. 이 양심은 본래부터 화인맞은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3 : 16에 의하면 본래는 선한
양심이었습니다. 선한 양심이 죄를 지음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자기의 소리 곧 양심의 소리,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왜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우리의 현실은 부정과 부조리를 일삼고 있고, 도덕과 윤리는
땅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것은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소리를
듣기만 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 이상 혼란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소리를 들으면 부정을 일삼을 수 없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들으면 질서를 지키고 예의를 갖추게 됩니다. 자기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아니 듣지 않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 소리를 듣지 못하면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맙니다. 다른 사람이 파멸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자신을 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은 누가 감옥에 집어넣기
때문이 아닙니다. 법이 가두어 놓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의
소리,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해서 자기가 스스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마치 법이나 다른 사람이 자기를
감옥에 가두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소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3. 하나님의 소리를 듣자.
우리는 소리를 듣되 세상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만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소리는 영의 소리입니다.
소리는 음입니다. 소리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밑에서 올라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 소리는
혼음이라고 합니다. 혼탁하게 만들고 정신이 없게 하는
소리입니다. 이 소리는 판단력과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합니다.
이 소리는 마귀로부터 오는 소리입니다. 또한 옆에서 나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 소리는 잡음입니다. 잡음은 인간의
소리요 세상의 소리입니다. 세상을 봅시다 얼마나 잡음이
많습니까? 인간의 소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이면 누구나
저마다 소리를 지릅니다. 이것은 모두 잡음입니다. 그런가
하면 위에서 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위에서 오는 소리는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를 향해 계속해서 복음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이 어떻게 들려옵니까? 죄를
범하고 숨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3 : 9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고 하십니다. 10절에
아담이 대답하기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고 합니다.
누가 아담에게 벗으라고 한 것입니까? 사실 아담은 벗고
지낸 것이 아닙니다. 입고 있었습니다. 그가 입은 것은
직조로 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옷, 영광의
옷, 세마포의 옷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입혀 주셨던 것입니다. 이 옷은 헤어지지
않습니다. 이 옷을 입어야만 천국에 갈 수 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신 것은 그를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가죽 옷을 지어 입히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범죄하고 숨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신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또 복음이 어떻게 들려옵니까? 4 : 8에
보면,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9절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가인이 대답하기를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고
변명을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가인이 고백을 합니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그러면서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보호의 표를 주셔서
누구를 만나든지 죽임을 면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살인하고 숨은 가인에게 찾아가셔서 그를 부르신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가인아 네 아우 아멜이 어디 있느냐"는
말씀이 곧 복음인 것입니다.
복음이 또 어떻게 들려옵니까? 창세기
6 : 5 이하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게 창조된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한탄하게 하실 정도로 악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그때 창세기 6 : 14에
보면, 모두 심판 받을 위기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구원의 방주를 짓도록 명령하십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준행합니다. 결국 그와 그의 가족이 홍수 심판 속에서
구원받았습니다. 노아에게 복음이란 인류를 심판하시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방주를 지으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이 어떻게 들려옵니까? 창세기 12
: 1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히브리서 11 : 8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떠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셔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으며,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브라함에게는
"떠나라"는 것이 복음이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출애굽기 3 : 4,5에 "모세야, 모세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못 가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함께 할 것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라고 하십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복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니까 애굽으로
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어떤 음성이 들려오고 있습니까? 들려와도 사울처럼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음성이 들려오든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다면 소리를 질러야
삽니다.
오늘 우리 현실을 보면 국민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잘못 지르면 반동자로 몰려서 감금당하기도 합니다.
가정에서도 소리를 지릅니다. 소리를 지르니 가정에 파탄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납니다. 친구에게도 소리를 지릅니다.
그 결과 원수가 될 뿐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디에다 소리를
질러야 합니까? 소리 지를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리질러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리를 지르면 반동자로 잡힐
염려도 없고 분쟁이 화해로, 원수가 친구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소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소리를 어디로 듣습니까?
첫째, 귀로 듣습니다. 귀로만 들으면
곧장 입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감정입니다.
둘째, 귀로 들어 머리로 갑니다. 그리고
입으로 나옵니다. 이런 사람은 지식의 사람이요 인격자입니다.
셋째, 귀로 듣고 머리를 거쳐 마음으로
듣습니다. 그 다음에 입으로 나옵니다. 이때 입은 침묵을
지킵니다. 이 소리는 수양받은 자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이 소리도 완전한 소리는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귀로 듣고 그 소리가 머리를
거치고 마음을 거쳐 영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바로 나오지 않고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 하나님의 소리가 마음과
머리로 갔다가 입으로 나옵니다. 이때 나오는 소리는 감사요
찬송이요 기도입니다. 믿는 자는 침묵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송으로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여러분! 소리를 들으십니까? 무슨 소리를
들으십니까? 세상의 소리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소리입니까?
우리는 세상의 소리도 듣고 자신의 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셨다면 또한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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