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죽음과삶

본문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 : 24

살아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리고 죽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삶과 죽음의 사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죽으면 그만입니까 죽음이 마지막이라면 오늘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리고 오늘을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1. 인간은 죽는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강산은 공동묘지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공동묘지가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도 금방 차버립니다. 요즈음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는지 영안실에 근무하는 사람들까지 걱정할 정도입니다. 한번은 영안실에 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때 직원 한 사람이 하는 말이,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있는 영안실을 가지고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한 번 꼭 죽습니다. 히브리서 9 : 27에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부유하고 건강한 사람도 언젠가는 죽습니다. 요즈음 자연식품이 인기인데 장수를 위해서 아무리 좋은 음식과 약을 먹어도 한 번은 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죽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먼저 식물적인 죽음의 상태가 있습니다. 곧 이미 죽었으나 기계의 작동에 의해서 숨을 쉬고 있는 식물 인간을 말합니다. 식물 인간은 의식이 없고 감각이 없다는 점에서 실상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뇌사 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이성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흔히 이성을 잃은 사람을 짐승 같다고 합니다.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의욕을 잃은 것도 죽은 것입니다. 의욕을 잃었다는 것은 꿈을 상실했다는 것이요, 미래에 대한 소원이나 기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죽은 사람입니다.

사람의 죽음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수명이 다해서 죽는 죽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통사고로 죽는다든지, 병으로 죽는다든지, 자살을 한다든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살해된다든지 하는 죽음이 있습니다. 가면 갈수록 세상이 복잡해 지니까 불의의 사고로 인해서 죽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위치한 강남구만 해도 이틀에 한 명씩 교통사고로 죽어간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러다간 수명이 다해서 죽는 사람보다는 사고로 인해서 죽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 같습니다. 인간은 언젠가 한 번은 죽습니다.

2. 인간은 또 죽는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도 괴로운 일인데 또 죽는다니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또 한 번 죽는다는 것은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 : 27에 보면, 사람이 한 번 죽고 나면 그 뒤에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심판이 있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또 죽는다는 것은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판이 있다는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만약에 죽음이 끝이라면 심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끝이 아니기에 심판이 있고, 심판이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때 심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살아온 모든 행위를 따라 이루어집니다. 요한계시록 20 : 12에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는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모두 기록되고, 그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 : 13이하에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고 했습니다. 불못은 지옥을 말합니다. 지옥에 가는 것이 둘째 사망인 것입니다. 이것은 영의 죽음입니다.

사람이 몇 번 죽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이 한 번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두 번 죽습니다. 한 번은 육으로 또 한 번은 영으로 죽습니다. 누가복음 16 : 19 이하를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는 이 땅에 살 때 비록 거지로 살았지만 죽어서 천국에 갔고, 부자는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죽어서 음부에 떨어졌습니다. 부자가 음부에 떨어진 것이 곧 둘째 사망인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사람이 한 번 죽어서 영원히 없어진다면 좀 후련할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도 서러운 일인데 죽어서 또 죽는다면 한 번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한 번 죽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이 있고 난 다음에는 영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둘째 사망에 들어가게 됩니까? 그것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0 : 15에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적을 두고 사는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권 또한 가져야 하겠습니다.

3. 인간은 산다

에베소서 2 : 1 이하에 "너희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해서 죽은 자들입니다. 육으로는 살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창세기 2 : 17에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대로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만 육이 죽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런 우리가 다시 살았습니다. 우리가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에베소서 2 : 4 이하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계속해서 13절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된 것입니다. 19절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의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려면 죽어야 합니다. 죽고 다시 살리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러면 왜 죽어야 합니까?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 : 10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고, 12절에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 : 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우리가 죽어야 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로 인한 죽음의 대가를 지불한 셈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다시 삽니다. 갈라디아서 2 : 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는 죽었습니다. 또한 사울이 바울로 다시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70년 전 세계에 공산주의가 생겨나서 점차 확산되었습니다. 세계는 점점 공산화 되어 갔습니다. 역사적으로 막스와 레닌을 거치는 동안 공산주의 이론이 정립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공산주의 이론만 들어가면 이성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신봉했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없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었습니다. 지금 러시아 공화국은 질서가 없고 엉망입니다. 그러나 저는 소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련은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이번 죽는 김에 잘 죽으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살게 될 줄 믿습니다.

4. 인간은 영원히 산다

이것은 인간이 영육간에 다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영원히 사는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죽는 것을 소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 : 2 이하에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8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고 영원한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는 영원히 사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어서 고통도, 괴로움도, 죽음도 없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 : 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안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그 집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히 산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상태로 누가 영원히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아마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고난과 핍박과 질병과 죄가 있는 이 곳에서 누가 영원히 살기를 소원할 것입니까? 영원히 살기를 바라되 고통도, 괴로움도, 슬픔도, 죽음도 없는 곳에서 영원히 살기를 모두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 : 3 이하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 : 51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불멸의 존재입니다. 죽어도 다시 삽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죽어도 영원히 삽니다. 문제는 지옥에 산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를 믿는 사람도 영원히 삽니다. 그들은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생각해 봅시다.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은 다시 삽니다. 죽어야 싹이 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으면 밀알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도 살기 위해서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묻혀야 합니다. 묻히되 우리는 십자가 아래 묻혀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묻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들이 날아와서 쪼아 먹습니다. 그러므로 쪼아먹히기 전에 묻혀야 하는 것입니다. 묻혀서 죽으면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있어도 없는 자처럼 묻힙시다. 배웠어도 안 배운 사람처럼 묻힙시다. 많이 가졌어도 안 가진 자처럼 묻힙시다. 그러면 언젠가 싹이 날 것이고 열매 맺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묻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입니다. 우리가 묻히면 우리가 속한 가정, 우리가 속한 직장, 우리가 속한 교회, 우리가 속한 나라가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은 부활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나에게도 부활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 제자들이 부활을 믿고 난 후에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온갖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담대히 주의 복음을 전하며 믿음을 지켰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믿음을 지키고 복음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복음의 증인이 되되 오늘 말씀처럼 언제 어디서든지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됨으로서 열매를 맺는, 다시 사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