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알지 못했으나 이제 알았다

본문 |욥1:1-3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욥기 1 : 1-3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통달하였으니라  -욥기 13 : 1

제가 어렸을 때에 욥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의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욥이 왜 어려운 일을 당했을까? 그리고 좋으신 하나님은 왜 욥이 고난을 당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셨을까? 욥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잘못을 했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셨듯이 깨끗하게 산 욥이 고난을 당했기에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조금 자랐을 때는 욥에 대한 이야기가 갈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도 이렇게 고난을 당한다면 굳이 하나님을 섬길 이유가 있는가? 고난을 당해야 한다면 하나님을 모르고 죄를 짓는 사람이 고통을 받아야 하지 않는가?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잘살고 축복을 받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잘사니 어떻게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착하게 살려고 예수까지 믿는 데 말입니다. 오늘도 이 욥에 대한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믿음에 바로 선 사람은 갈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저도 은혜를 받고 신앙이 자라면서 더 이상 갈등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욥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욥은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 1절을 봅시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했습니다. 욥은 순전한 사람입니다. '순전하다'는 말은 '순수하다' '순진하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3 : 10 이하에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순전한 자요 정직한 자요 하나님을 경외한 자요 악에서 떠난 자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순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정직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악에서 떠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욥은 악에서 떠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욥과 같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욥은 또한 가정적으로 보면 다복한 사람입니다. 그의 가정에 아내가 있고, 아들이 일곱에 딸이 셋이 있었습니다. 부모 형제가 무고하니 어찌 복받은 가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재산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의 재산을 보면,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되었습니다. 이 집은 종도 많이 있었습니다. 욥은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3절).

그런데 이런 욥이 어려움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하루는 스바 사람들이 와서 양들과 종들을 죽였고(1 : 15,16), 또한 갈대아 사람들이 와서 약대를 빼앗으며 종들을 죽였습니다(17절). 또 하루는 욥의 십남매가 맏형의 집에서 잔치를 하며 즐기고 있을 때 대풍이 불어 집이 무너짐으로 모두 죽는 참변을 당했습니다(18.19절). 거기다가 욥의 건강마저 꺾어지고 맙니다(2 : 7,8). 이렇게 되니까 마지막에는 아내까지 멸시하고 조롱하면서 떠나갔습니다(2 : 9). 다복하고 행복하던 욥이 하루 아침에 망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 이런 일을 당했으니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더 많은 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욥은 하나님께 칭찬받은 사람입니다(1 : 8). 그의 삶과 신앙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증하셨습니다. 이런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데 누가 하나님을 믿으려 하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욥은 알지 못했다

욥은 몰랐습니다. 무엇을 몰랐습니까? 욥은 굶고 헐벗는 것을 몰랐습니다. 배고픈 것을 몰랐습니다.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라 굶어 본적이 있습니까, 배고파 본 적이 있습니까. 배고프면 먹으면 됐고, 먹기 싫으면 안먹으면 됐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고 헐벗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실 남의 처지를 이해한다고 쉽게 말합니다만 경험해 보지 않고는 남의 사정을 잘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배고파 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배고픈 심정을 알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배척을 받아본 일이 없으면 배척받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배부른 사람이 배고픈 사람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진정으로 이해해서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머리로 생각해서 '그럴 것이다'고 하는 지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욥은 힘든 것을 몰랐습니다. 고생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자기 수하에 종이 많이 있어서 그들이 어려운 일을 다 했습니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종들이 알아서 다하는데 어떻게 고생을 알겠습니까? 욥은 다른 사람이 힘들어 하고 고생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종의 심정을 이해하려면 종이 되어 봐야합니다. 종이 되어 보지 않고는 종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인의 입장에서 종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것입니다. 대부분 남의 밑에서 생활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모두 다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욥이 억울한 것을 몰랐습니다. 분한 것을 몰랐습니다. 고민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언제나 존경받는 위치에 있고 다른 사람을 부리는 자리에 있는데, 그 자리에서 어떻게 억울한 사정을 알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분해 하는 사람의 심정을 알 수 있습니까? 욥은 이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항상 건강하기 때문에 아픈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니 병든 자의 심정과 그 아픔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만이 아닙니다. 가정이 다복하니까 아들이 필요한 것, 딸이 필요한 것을 몰랐습니다. 자식이 열이나 있으니 자식 없는 사람의 심정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들 하나 있었으면, 딸 하나 있었으면 하는 사람의 심정을 몰랐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의 자식 귀한 줄도 몰랐습니다. 남의 자식이 귀한 줄 모르면 자기 자식도 귀한 줄을 모릅니다. 남의 자식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만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자기 자식을 그만큼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욥은 열 남매가 있었지만 그 자녀가 얼마나 귀한가를 몰랐습니다. 자식을 낳고 싶어하는 부모의 마음도 몰랐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무엇을 압니까? 배고픈 것을 압니까? 헐벗는 것을 압니까? 그렇다고 돈이 귀한 줄을 압니까? 너무 흔하고 많으니까 귀한 줄도 모르고 그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철이 없는 것입니다.

욥은 행복이 무엇인지 불행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건강할 때 건강을 몰랐습니다. 부유할 때 부유를 몰랐습니다. 자식이 있으니 자식 귀한 줄 몰랐습니다. 많은 은혜와 축복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것이 귀한 줄을 몰랐습니다.

2.욥은 알았다

그러나 욥은 이제 알았습니다. 욥은 병들고 보니 건강한 것이 축복인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병든 자의 심정을 알았습니다. 욥은 병들고 보니 친구도 알았습니다. 전에는 그렇게 다정했던 친구들이 조롱을 합니다. 그래서 친구도 돈이 있을 때, 건강했을 때 친구지 병이 드니 친구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욥은 병들고 보니 아내를 알았습니다. 건강하고 물질이 많을 때는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더니 건강을 잃고 재산이 없어지니까 아내도 아내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욥은 이제 알았습니다. 행복도, 불행도 알았습니다. 물질도 알았습니다. 고난도, 억압도, 병든 것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가능도 알았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지 않을 때는 가능성만 있었습니다. 더 부자 될 가능성, 더 다복할 가능성만 있었으나 고난을 당하고 보니 불가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가능하다고 깨달아지면 갈등되고 고민하게 되며 방황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자살까지 하게 됩니다.

이런 욥기 이렇게 고백합니다. 13 : 1에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통달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자기의 처지도 보았고, 친구들이 조소하는 것도 보고 들었으며, 아내의 말도 다 보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남의 처지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13 : 3에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욥은 고난을 당한 후에야 하나님을 전능자로 알았습니다. 하나님만이 전능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믿을 수 있고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말을 전능자에게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욥은 전능자에게 얼굴을 들었으며, 전능자를 기뻐하였고, 서원하며 기도했습니다(22 : 26,27). 결국 욥은 그 전능자를 통하여 두 배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42 : 10에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고 했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많은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고난을 통해서 그의 믿음이 견고해졌습니다. 하나님의 깊이 만났습니다. 형통할 때보다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42 : 5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고 했습니다. 형통할 때는 희미하던 하나님이 고난이 있은 후에는 뚜렷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는 믿음만 확고해진 것이 아니라 소망도 확고해졌습니다. 욥은 고난이 고통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곧 축복임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 있습니까? 고통스럽고 짜증나는 고난 속에 있습니까? 지금은 이해되지 않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것입니다. 왜 그 어려움이 있는지, 그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시려고 했는지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속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금 더 참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을 알게되면 하나님을 겸손히 섬기게 됩니다. 자신을 알게 되면 이웃을 돌아보게 됩니다. 자신을 알게 되면 자신만을 위해서 더 이상 살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세상을 알고 다른 사람을 알면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가능성 속에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가능성 속에 있는 사람은 언젠가는 불가능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혹시 불가능 속에 있으신 분이 있습니까? 전능자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가능성 속에 있을지라도 전능자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가능성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것이 가장 큰 축복이 됩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모든 것을 알고는 전능자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알게 되면 전능자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성 속에 살지 말고 전능자 속에서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