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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복음
19:9-10
지난 5월1일부터 10일까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운영위원들과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함께 다녀왔습니다.
수년 전 첫 번째 성지순례 때는 먼저 구라파를 순회한 뒤
이스라엘 성지를 돌아보고 이집트를 경유하여 돌아오는
코스를 밟았었습니다. 그 때는 성지순례가 처음 시행되는
초기단계라 여러 그룹과 불신자까지 포함되어 솔직히 은혜롭지
못한 성지순례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성지순례는 본 교회
성도님들의 기도와 신실한 가이드의 안내로 풍성한 은혜를
체험한 성지순례였음에 감사드립니다.
이번 성지순례는 주님의 발자취를 더듬는
성지순례였습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성지순례
도중 저는 네 번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실 성지순례는 자기
신앙만큼 은혜 받을 수 있습니다. 신앙이 없으면 성지순례를
가도 성지순례가 아니라 단순한 관광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신앙이 작으면 작은 정도의 은혜만 받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크면 큰 만큼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며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1. 고난의 발자취
예수님은 고난의 발자취를 걸어가셨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시는 순간부터 고난의 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시자마자 애굽으로 피난 가시고 나사렛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시고, 갈릴리에서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셔서
공생애 사역을 행하였습니다. 공생애 중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자신의 고난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셔서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신
고난의 발자취를 걸어가신 주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주님께서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떠난 지역을 이른 아침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준비된 모의 십자가를
직접 메고 올라갔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악의 짐을
위해 십자가를 어깨에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모습을
생각하며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성지순례 중 제가 큰 눈물을
흘렸던 곳은 애굽을 출발하여 시내산을 가면서였습니다.
애굽을 떠나 비록 버스를 타고 시내산을 향해 출애굽하였지만
그 버스 안에서 얼마나 뜨거운 눈물이 나는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간 애굽에서 노예 생활의
고역을 치른 후 출애굽하는 광경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습니다.
시나이 반도를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 영적인 지도자 모세가 연상되었습니다.
저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는 한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로서
부족함과 연약함과 동질감을 느껴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시내산을 캄캄한 새벽
2시쯤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어렵고 험난한 코스였습니다.
보통 어렵다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정상에 올라서서
날이 새기를 기다리는데 다음 번에는 도저히 올라올 수가
없었을 것 같았습니다. 또 하산을 해야 하는데 두 코스가
있었습니다. 쉽게 내려갈 수 있는 길과 난코스가 있었습니다.
저는 가장 어려운 코스를 택해 하산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렇게 어려운 성지순례가 주님의 걸어가신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2. 구원의 발자취
우리 주님이 남기신 발자취는 어떤 발자취입니까?
주님의 발자취는 구원의 발자취입니다. 우리 주님의 발자취가
미치는 곳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셨습니다.
그 곳에서 키가 작은 삭개오라 하는 세리장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9:5). 원래 그는 아브라함과 관계없는
육적인 혈통에 속한 자였지만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니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구원의 역사가 그에게 임했습니다(눅
19:9).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9:10).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구원의 역사가 임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발자취는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구원의 역사가
임하는 줄 믿습니다.
따라서 예수라고 하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말로 대표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자입니다. 악에서 구원하실 자입니다.
시험에서 건지시고 구원하실 자입니다. 환난과 질병에서
구원하실 자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는 그가 곧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구원이 임하며,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3. 승리의 발자취
주님의 발자취는 승리의 발자취입니다.
골로새서 2장15절을 보면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보니 예수님의 무덤이
두 군데였습니다. 그 중 하나는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무덤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무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 어떤 것이 진짜 무덤이라고 주장할지라도, 무덤의
수가 몇 개가 될지라도 관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무덤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무덤에 갇혀 있으면 실패자이지만 무덤에서 나오면 승리자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미 죽음의 세력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덤을 보지 말고
부활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승리하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2장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였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11장33절을 보면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라고 말했습니다. 고난이
있어도 구원의 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난이 있어도
승리의 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승리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예전의 합동찬송가에는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닌가”라는 찬송이 있었습니다.
이 찬송처럼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구원의 역사와 승리가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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