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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 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갈라디아서 4:12-20
교회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는 선생님들은
그저 주일날 와서 1시간 정도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단순히
가르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편모나 서모처럼
사랑과 정성 없이 우리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뱃속에서 낳은 자녀처럼 부모의 심정을 갖고서 잘
양육시킬 때 저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성장하게 됩니다.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교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우리 교회는 자연스럽게 부흥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바라고 원하기는 우리 교회의 초등처
선생님들은 모두 그런 교사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내가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영혼들을 친자식처럼 우리 선생님들이 잘 양육하며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고통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첫째 잉태의 고통이 있으며, 둘째로는 해산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양육의 고통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의 고통을 잘 감수하며 인내하는 가운데에 교사의 직분을
성실히 감당한다면 그 선생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실한 믿음의 스승이 될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혀 모르는 나이 많은 아주머니께서 전화를
하신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1955년도에 충청도에서 전도사로
제가 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 주일학교에 다녔던 학생이었습니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서 교회의 집사님이 되신 분입니다.
저는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집사님이었지만 제가
주일학교의 전도사로 있을 때에 제 밑에서 학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혜도 받고, 저의 설교를 통해서 신앙이 잘 성장하였고,
또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저를 그리워해서 전화를 했다고
하니 얼마나 그분이 정답고 그립고 보고 싶은지 모릅니다.
저는 그 전화를 받고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교회의 전도사로서 주일학교의 어린 생명들의 영적인 신앙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의 사명이 이렇게 막중하고 소중한 직분임을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또한 제가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을 하였지만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는 한 분이 계십니다. 이분의 성함은 임순옥 집사님입니다.
이분도 마찬가지로 제가 전도사 시절 때 가르쳤던 주일학교의
학생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도 아주 열심히 잘 다니고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 했는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이 생생할
정도입니다. 지금은 대전에 있는 대흥침례교회의 집사님으로서
교회를 너무나 잘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어느
날 저를 찾아와서 장성한 아들과 딸이 있는데 둘 다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우리 교회에 출석을 시켜서
신앙생활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서 너무나 기쁘고 기특해서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해 주었습니다. 이제는 무슨 일만 있으면 자식들을
데리고 와서 저에게 안수기도를 받고 가는데 그 은혜를
사모하는 모습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쩜 그렇게 한결같이
예쁘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비록 제가 낳은 딸은 아니지만
영적인 부모의 심정을 저는 항상 그분을 볼 때마다 느끼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교사들은 어린 영혼들을
위해서 수고하며 애를 써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영혼이
믿음 안에서 잘 성장하고 훌륭한 신앙의 사람으로 자라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막중한 사명이 우리 교회의 선생님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맡겨진
교사의 사명과 직분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고와
노력을 기울여야만 할까요?
1. 교사는 잉태의 고통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아이를 임신한 여자의 배는 시간이 갈수록
남산처럼 커다랗게 부풀어 오릅니다. 얼마나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힘든지 겪어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또한 아이를
잉태한 동안에는 어떠한 약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수면제를 먹거나, 감기가 걸렸다고
해서 감기약을 먹어서는 태아에게 해롭기 때문에 안 됩니다.
심지어 커피를 마시는 것도 자제해야만 합니다. 무려 10개월을
산모는 불편해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런 것이 육적으로
잉태한 어머니가 감당해야만 하는 고통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잉태는 어떨까요? 이 상태는 육적인 잉태처럼 10개월만
고통을 감수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떨 때에는 10년이
걸리기도 하고, 20년이 걸리기도 하고, 30년이 걸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평생이 걸리는 것이 영적인 잉태 기간입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자면 내가 전도를
해서 한 영혼을 교회로 인도를 하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전도한 사람을 영적으로 잉태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도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미리 영적인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쉽게
출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어미 닭이 자신의 따뜻한
날개로 달걀을 품듯이 영적인 잉태도 그러한 수고와 고통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병아리가 그 껍질을 깨고 나오기까지
어미 닭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무더위와 싸워가며 꼼짝도
않고서 품는 것처럼 우리 영적인 부모들도 자신이 전도한
영혼이 믿음의 사람으로 잘 성장할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의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라”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도 어미의 심정으로 많은 사람들을
염려하고 아끼셨음을 잘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제가 바라고
원하기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선생님들과 특별히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초등처의 교사들도 이러한 열심과 사랑과 관심을
품은 진정한 스승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인 잉태의
시간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전도한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으로 잘 성장할 때까지
끊임없는 사랑과 관심을 갖고서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야만
하는 참으로 길고도 긴 인고의 시간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우리 어린아이들이라면 그 잉태의 고통은 그만큼
더 길어진다는 사실을 영적인 부모가 되는 선생님들은 깨닫고서
학교와 집으로 계속해서 전도하고 심방하는 가운데에 우리
초등처가 날로 날로 부흥하고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2. 교사는 해산의 고통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19절을 보면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임신한 여자가 아이를 낳기 위해서
병원에 들어가면 죽으러 간다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해산의
고통이 크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비록 제가 아이를 낳지는 않았지만 전도사
시절에 본의 아니게 해산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간접적으로
경험했습니다. 시골에서 전도사로 목회하고 있을 때였는데
동네에 한 아주머니가 갑자기 해산을 하게 되어 마땅한
산파가 없어서 제가 대신 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서 그 집에 당도해 보니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이제 곧 아이를 해산할 며느리는 비명을 질러대면서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휘둘러댔습니다. 그 힘이 얼마나
억센지 남편도 나가떨어지고, 옆에 있던 시아버님도 나자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차마 방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며느리가
고통을 못 이겨서 신음하며 비명을 지를 때마다 명색이
전도사이기에 방 밖에서 “주여, 주여 힘을 주시옵소서”라고
열심히 기도하며 응원을 하였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무사히
출산을 하게 되었지만 저는 그때에 아이를 해산하는 어머니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그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아이를
낳는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의 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15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자신있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이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얼마만큼 수고하고 고통을 감당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단지 지식만을 가르치는
편안한 스승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그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혼 구원의 사역을 위해서 해산의
고통을 능히 감당하는 아비와 어미로서의 힘든 길을 걸어갔다는
사실입니다.
3. 교사는 양육의 고통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부모가 아이를 잉태하여 해산의 고통을
거쳐서 낳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를
건강하고 잘 키우기 위해서 목욕도 자주 시켜주고, 무더운
여름날에는 엉덩이에 땀띠가 생기지 않도록 분도 발라주고,
아프면 뜬눈으로 밤을 새기까지 수고하며 노력하는 것이
부모의 의무이자 역할입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아이가 조금
자라서 크면 학교에 보내서 공부도 시켜야 하고, 남들보다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사 주기 위해서 고생하며 수고하는
것이 부모의 길이요 사명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자녀들이
조금이라도 나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항상 노심초사하며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이 부모의 고통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1-2절을 보면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향한 격려와 권면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지금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서 ‘내 아들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시피 바울은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에게는 아내도 자녀도 없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디모데를 가리켜서
바울은 자신의 아들이라고 불렀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디모데는 바울이 복음 안에서 낳은 영적인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인 아들을 낳기 위해서 바울은 잉태의 고통, 해산의
고통, 양육의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 디모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의 사람으로 잘 성장시키고 키우기 위해서
참으로 많은 날들을 눈물로 기도하며 간구하였을 것입니다.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가르치며 권면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잉태의 수고와 해산의 수고와
양육의 수고로 말미암아 영적이 아들 디모데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을 하여서 이제는 한 교회를 책임지며 담당하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초등처의
교사로서 수고하며 애쓰시는 선생님 여러분. 이 시간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처럼 우리 모두 바울처럼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서 기꺼이 잉태의 고통과 해산의 고통과 양육의 고통을
감당하는 영적인 부모가 됩시다. 우리가 키운 어린 영혼들로
하여금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 되도록 잘 인도합시다. 그리하여
바울이 장성한 디모데를 보고서 보람을 느끼며 기뻐하였던
것처럼, 우리들도 내가 키운 영적인 자녀들의 신실한 믿음을
보고서 만족하며 즐거워하는 가운데에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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